나라전체가 뒤숭숭한 시절이지만, 오랜만에 수다 한 편 올립니다.
격월간지 민들레 107호 <멈출 수 있는 용기>에 꽃다운친구들 이야기가 소개되었거든요.
또 한번의 클릭이 귀찮으신 분들을 위한 배려로 전문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링크도 있구요. http://bit.ly/2eHLRXH
[꽃다운 친구들, 방학이 일 년이라니!]
이수진
‘꽃다운친구들’ 대표. 사회복지와 가족치료를 공부했다. 건강한 가족공동체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 스스로 가족 컨설턴트라
이름붙이고 학교, 도서관, 복지관 등에서 강의와 상담을 하고 있다.
kochin@brightfund.org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용돈 아껴 써라”, “어디 학원이 좋다던데 거길 다녀라”, “쟤랑은 놀지 마라”, “지금부터 딱 한 시간만 놀아라….” 자녀를 겨냥한 부모의 명령, 충고, 훈화를 다 모아본다면 가히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인생 지침서(라고 쓰고 ‘잔소리 종합선물세트’라고 읽는다)’가 될 것이다. 학습은 물론이고 경제, 사회, 문화, 종교까지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는 것 같다. 이게 다 아이 잘되라고 하는 거다, 소중한 내 아이니까 일거수일투족 관리해주는 거다, 이러는 엄마도 피곤하다, 자기 일 희생하고 하는 거다, 옆집 아이에겐 그런 참견 안 한다는 말도 덧붙여가며 말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지침서를 가진 부모들도, 아이가 서너 살쯤 돼서 “싫어!”라는 말을 달고 살거나 모든 동사 앞에 ‘안’을 붙여 “안 먹어” “안 자” “안 사랑해”라고 말할 때의 당혹스러움을 기억할 것이다. 딱 청개구리 같던 시절, 그땐 제아무리 저항을 해봤자 금세 힘센 부모의 무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에 그 모습이 오히려 귀여웠다. 그러나 소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이가 보이는 저항은 ‘요 녀석 봐라. 당돌하군’ 정도를 넘어 부모로서 위기감마저 느끼게 한다.
며칠 전 우리 집에서도 모자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중3 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친지들로부터 받은 특별용돈을 모아둔 통장에서 마음대로 돈을 꺼내 쓰지 못하는 것에 항의하면서 “내 돈인데 왜 내 맘대로 못 해? 왜 엄마는 나를 과소평가해? 나도 알아서 잘할 수 있거든?” 이라고 했다. 전에도 아들이 이런 식으로 몇 차례 항거한 적이 있지만 매번 이 현명하신 엄마의 지침에 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아들의 말에 무게감을 느낀 엄마가 자존심상 한두 번쯤 우기다가 결국엔 아들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게. 결국 네 돈인데, 미래를 위해 모아두는 편이 좋을 거라는 엄마의 판단을 믿고 따르라 했네. 언젠가는 네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마음먹긴 했지만 정작 그 언제가 언제인지는 나 도 참 막연하구나.’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며.
이렇듯 자녀를 ‘믿지 못함’에서 비롯된 통제는 믿어주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모드를 전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도 아이들의 시기별 저항적 몸부림 덕분에 부모도 수시로 각성하고 나이가 들어도 계속 삶의 태도를 전환하게 된다. 21년째 엄마 노릇을 하면서 나름 전환하는 법을 배우며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5년 터울의 둘째 아이는 쉽게 키울 것 같은데, 그렇지만도 않다. 마음의 부대낌은 시시때때로 새롭기만 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학기 중에는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므로 자유로운 시간은 두어 시간을 넘기기가 어렵다. 주말과 방학에는 보충학습, 선행 학습, 각종 영양가 있(다고 믿고 싶은)는 체험 등으로 꽉 짜인 스케줄에 자유시간을 빼앗긴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고3 수험생만큼 비장한 각오로 만들어진 일정표를 따라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도 아이들의 것이 아니다.
참을 만한 멍 때리기의 비밀
2012년 2월에 중학교를 졸업한 큰아이는 고등학교 배정을 보류하고 일 년 동안 긴 자체 방학을 가졌다. 당시에는 이름도 생소했던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학교 공부에서 잠시 떠나 진로탐색을 위해 일 년 동안 관심있는 일을 체험해보는 프로그램. 아이가 왜 공부하는지 모른 채 고교 3년을 고생스럽게 보내게 하긴 싫었던 엄마 귀에 매우 솔깃한 정보였다)를 개인 차원으로 적용해 볼 야무진 속셈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공부하는 목적과 의미가 생기리라 기대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시간을 갖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을 누리면서 그걸 찾아보지 않겠냐고 던졌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딸은 학교에 가지 않고 홀로 긴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일 년의 방학을 아이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아니, 원래 아이 것 이었는데 아이에게 되돌려 준 것이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아들이 저항을 통해 자기 용돈에 대한 권리를 부모로부터 쟁취한 것처럼,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어.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라며 고민하던 딸아이의 소심한 아우성은 시간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적극적으로 찾게 해준 단초가 된 셈이다.
자기 시간을 자기가 알아서 사용하는 것. 누구에게나 그 기회는 열려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긴 방학을 가질 수는 없다. 큰딸은 할지 말 지 결정하는 데만 일 년 반이 걸렸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단한 용기와 포부,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잘은 모르겠는데(당연하다.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아침마다 늦잠 잘 수 있다는 것에 일차적으로 낚이고(이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두 번째로는 남들과 달리 뭔가 특별해 보이는 것도 기분 괜찮을 것 같으니까 여타의 불안과 걱정을 ‘맨 뒤로 보내기(컴퓨터 편집용어)’ 처리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부모가 한번 해보라고 부추기니 어느 정도 책임은 나눠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좋다. 하고 싶은 마음 51, 하기 싫은 마음이 49로 안식년을 선택했을지언정 일단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큰 모험은 열여섯 평생에 처음이었을 것이다. 안식년은 아무나 못 누린다. 선택하는 사람만이 누린다.
그러나 달랑 한 달밖에 안 되는 방학도 뭘 할지 막막하고 무료한 날이 더 많게 마련인데, 곱하기 12라니! 딸의 붕괴된 일상을 예상하여 실제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바람직한 방학생활을 기대하기도 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이는 매우 오랜 시간 자고, 조금 놀고, 아주 가끔 의미 있어 보이는 활동을 했다. 의미 있어 보이는 활동이란 학교에 다닐 때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취미생활과 약간 색다른 공부, 아빠와 함께한 여행을 말한다. 그러니 평상시 방학이 12배로 늘어난 것과 정말 똑같았다! 아일랜드처럼 진로체험 기회를 찾아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거의 시도도 해보지 못했다. 엄마의 막연한 기대는 안식년 초기에 깨끗이 접었다. 내가 주경야독 하느라 바빠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 덕분에 딸은 오롯이 자신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교과공부에서 해방된 아이는 긴 빈둥거림과 가끔의 특별한 경험에 자신을 던져두었다. 잠을 자든 드라마 삼매경에 빠지든,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시간을 움직이는 사람은 일단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에게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는 얼마나 큰가. 그래서 얼굴도 밝아지고 예뻐졌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부대효과로서 아이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변화였다(꽃다운친구들 1기의 한 부모님도 지난 8개월간 아이의 가장 큰 변화는 단연코 예뻐진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가장 자기다워지는 시간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저러다가 사람이 굼벵이가 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최대치 빈둥거림을 지켜보면서(아이도 자신의 한없는 게으름을 경이롭게 생각하는 듯했다) 여러 번 마음이 끓어올라 억제할 수 없는 잔소리가 종종 튀어나왔다. 아무리 방학이 길다지만 자기가 신생아인 줄 아는지 일 년 내내 하루 10시간 수면은 기본이었다. 불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스스로 알아보라고 하니 응, 응, 대답만 하다가 결국 한 달쯤 지나서야 인터넷으로 ‘아베세데’를 익히기 시작, 샹송이라도 한 곡 마스터할 줄 알았는데 한 달쯤 뒤부터 불어를 공부하는 딸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이보다 더 순수한 방학생활이 있을까 싶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고무적인 일이 있었는데, 매일 정오가 넘어야 겨우 일어나는 아이가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맡은 역할을 위해 일 년 내내 아침 7시면 집을 나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연예인 팬 사인회에 가기 위해 주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결국 성취해내는 성실함을 보면서 ‘이런 바람직함이 더 자주 목격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또 좋은 점은 가족끼리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만 가능한 진심 어린 대화를 자주 나눌 수 있었다는 것. 주로 ‘부모성토대회’였지만 말이다. 아이가 자신의 마음속 복잡한 감정들을 알고 싶다고 해서 심리검사도 받고 좋은 상담 선생님을 만나 수차례 마음을 탐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렇게 대체로 멍 때리고 빈둥거리며 10개월 정도 지나니 그제야 공부 걱정을 아주 조금 하는 것 같았고, 고등학교 입학을 한 달 앞두고 수학 문제집 한 단원 정도를 미리 들여다보는 것으로 아이는 긴 방학을 마무리했다. 이후 3년간 동네 일반 여고에서 한 살 어린 동생들과 무난히 지내다 졸업했다. 가끔은 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언니 역할도 하면서.
진로, 길을 걷다가 때마침 발견하는 풍경
그 후 몇 해 동안 우리 가정의 특별한 경험을 궁금해하는 분들에게 대단한 듯 대단하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이 생겼다. 그러다가 입시경쟁에 찌들어 앞만 향해 달려가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에게 느릿느릿 걷는 시간도 의미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어져서, 남편과 함께 ‘숨쉬는방학 꽃다운친구들’이라는 청소년 자유학년제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꽃다운 나이, 열여섯 살 이팔청춘 청소년들에게 빈둥거리는 시간을 돌려주자는 취지로 만든 모임이다. 2016년에는 열한 명이 일 년의 자발적 방학을 선택했다. 사 년 전 딸은 혼자 외롭게 보냈지만, 이제는 ‘꽃다운친구들’로 만난 청소년들끼리 함께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꽃다운친구들은 일주일에 두 번 만나서 자(기탐구)・봉(사활동)・여 (행유희)・관(계형성) 네 영역 활동을 통해 자신과 세상의 맛을 느끼고 뜻을 깨닫는 배움과 사귐의 시간을 갖는다. 이틀 동안 밥 지어먹기, 생 활문 나누기, 책 읽고 글쓰기, 캠핑, 여행, 사진, 음악, 미술, 연극, 사람 책 도서관, 장애인복지관 방문, 놀러가기 등 다채로운 시간을 보낸다. 함께이기에 가능하고 즐거운 활동들이다.
자기이해 활동의 하나였던 ‘덕밍아웃(덕질+커밍아웃)’시간이 내게 특히 인상 깊었다. 11인 11색의 개성미 넘치는 덕후들이 자신의 세계를 선보였는데 신발 디자인, 아이돌, 보드게임, 페이퍼 아트, 재즈, 애니메이션 등 그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덕질의 깊이와 열정도 대단해서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자신이 좋아하고 에너지를 쏟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던 한 친구는 긴 고민 끝에 자신이 사람 얼굴과 이름을 오래 기억한다는 것, 사람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4월에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미수습자 허다윤 학생 어머님을 초청해 얘기를 나누고 홍대 앞에서 열린 단체 피케팅에 참여했으며, 그 만남을 기억하면서 열한 명이 함께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어 추모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렇게 부지런히 이틀을 함께 보내고 나머지 5일은 최대한 빈둥거릴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집에 서 각자 보낸다.
작년, 꽃다운친구들 설명회에 취재를 온 기자가 “일 년의 방학이 꿈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느냐”고 묻자 딸은 “안식년이라는 대담한 선택 을 해보았기에 앞으로도 꿈을 찾아갈 때 주도적으로 조금은 대담하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다소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열두 달 동안 잘 쉬었지만 소위 진로, 앞으로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선명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아이가 보낸 일 년의 방학은 시간 낭비였을까? 앞서 말했듯 나도 처음엔 아이가 입시전쟁 속에서 덜 고생하길 바라며 공부 목적이라도 찾아보라는 의미로 안식년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딸 입장에서는 질리도록 쉬어본 후 양심상 공부 좀 해야겠다는 가책 정도를 느꼈지, 뚜렷한 꿈을 찾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까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엄마아빠도 관찰하고,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구경하면서 ‘그 시간과 그곳’을 충분히 살았던 것이다.
요즘 꿈이 없다고, 장래희망이 없다고 걱정하는 초등학생들을 자주 본다. 중고등학생은 장래희망이나 원하는 직업이 없는 것을 아예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해마다 3월초 학생 조사서에 부모가 희망하는 자녀의 직업을 써야 하는 것은 내게도 고역이다. 빨리 진로를 정하라고 재촉하는 이 세태가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진로는 직업을 정하는 것이 아닐 테고 학교 현장에서도 꼭 그렇게만 접근하는 것은 아니겠지만,진로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체감하는 진로교육은 사실상 ‘직업 찾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어린이, 청소년 시절에 자기 적성을 찾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진로탐색 과정에서 직업 적성, 직업 흥미검사 등을 통해 단서를 얻기도 하지만 참고자료일 뿐 검사결과가 그 아이를 다 말해주지는 못한다.
느리게 걷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다. 바삐 지나갈 때는 못 보는 나 자신과 세상의 다채로운 풍경이 그것이다. 그 안에서 자신의 흥미, 적성의 희미한 실마리를 조금씩 맛보는 것이 청소년기에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딸의 대답은 참 정직하다. 긴 휴식을 선택한 자신의 용기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인생의 여정에서 뭔가 영향력을 발휘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 기간을 통해 ‘비교적’ 좋아한다고 알아차린 분야로 대학 전공을 정했지만, 이 또한 진로의 일부분일 뿐 인생 전체를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진로는 적성을 발견하자마자 후딱 정해버려야 할 어떤 과녁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알아가며 끊임없이 적응하고 가꾸어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지금 꽃다운친구들도 아홉 달째 느슨한 시간표로 천천히 걸으면서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다양한 인생 선배들을 만나 넓은 세상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이 시간 자체가 일 년 뒤서기로 작정한 아이들의 진로인 셈이다. 이들이 계획하지 않고 의도하지도 않은 소중한 풍경들을 감상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딸의 안식년에 쌓은 엄마 내공
청소년기 아이들이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할 때, 부모들의 본능적이고도 자연스런 반응은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내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와”일 수 있지만, 나는 그 일 년 동안 의지적으로 반응을 다르게 해본 셈이다. 아이가 ‘잘해낼 것’을 굳건한 믿음으로 믿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을 지지해 주는 쪽으로 말이다.
어쩌면 ‘잘 못할 것’을 알고도 허락하는 것에 가까웠다. 자기 힘으로 자기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맷집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실수와 실패를 경험해볼 수 있다면 긴 인생 살아가며 이보다 더 좋은 배움이 있을까. 시행착오 없는 매끈한 성공은 매력이 없다. 그래서 ‘웬만한 간섭을 제거하자, 결국 제 힘으로 살아갈 아이들이다, 연습할 기회를 빼앗지 말자’고 지금도 되뇐다.
어느새 경력 21년차지만, 솔직히 뭘 해도 안 해도 늘 불안한 이 부모 노릇을 빨리 졸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런데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부모가 뭘 하든 안 하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괜한 걱정과 불안은 모두 안드로메다로 보내야 하지 않을까. 갈수록 그게 참 아이러니다 .
더불어, 부모의 본능적 불안을 견디는 데에는 부모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것이 가장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살뜰히 보살피다 보면 아이 삶에 시시콜콜 간섭할 한가함이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점점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내어주는 괜찮은 부모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순수하게 아이의 시간을 자기 것으로 되돌려주고 싶은 부모,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연습의 기회를 주고 싶은 부모, 잃어 버린 웃음과 아이의 고유성을 되찾고 싶은 부모들이 혼자 고민하지 않고 꽃다운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다.
꽃다운친구들은 자녀와 부모가 함께하는 가족동행 프로그램이므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부모 모임을 열어서 ‘연애 시절’을 소재로 수다 를 떨기도 하고, 아이들의 성격유형을 엿보며 부모로서 성찰의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몸을 부대끼며 놀기도 하고, 진학지도 강연도 들었다. 또 중년의 건강관리, 한국의 인권문제 등 부모들끼리 품앗이로 배움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사실 삶에 지친 중년의 부모님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이 무리이지 않을까 처음엔 우려도 했는데 자녀의 안식년이라는 공통분모만으로도 든든한 동지애를 나누는 모임이 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자기 아이 또래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대부, 대모의 심정을 가지게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공동체라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꽃다운친구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또 다른 학교로의 탈출이 아니라 가족구성원으로의 귀환이다. 건강한 독립을 위한 토대로서 안정감 있는 가족 관계, 친밀한 관계를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나 일 년의 방학을 또 하나의 스펙 쌓기 아이템으로,다음 단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충전 기간으로, 혹은 확실하게 진로를 찾는 시간만으로 여기는 부모님들은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부모가 흑심을 품으면 그 방학은 이미 방학이 아니다. 자기 의지 없이 부모 손에 끌려온 아이들은 긴 방학을 부모의 감시 가운데 괴롭게 보낼 것이 분명하다. 꽃다운친구들은 이제 겨우 첫돌도 지나지 않은 걸음마 시기를 보내고 있다. 다만 작년에는 우리 딸아이의 희귀하고 희미한 사례에 기댄 담대한 ‘예언’이 전부였다면, 이제 열한 가정의 생생한 ‘증언’이 마련된 셈이다. 아직 한 줌이지만 너무도 귀한 한 줌이다. 이들의 용기와 결단이 쌓이다 보면 오늘날 아이들에게 유해하기 짝이 없는 교육환경에 힘찬 똥침을 날리게 될 테니 말이다.
무슨 방학을 일 년씩이나? 길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백 세 인생 중 겨우 100분의 1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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